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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9.20 여기는 내가 속할 자리가 아니다.

그래서, 바로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다.

오스트라바 외곽 지역들을 꼬불꼬불 이어 주는 낡은 협궤 전차를 타고 아무 데로나 그냥 실려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무 데서나 내려, 역시 그냥 아무 노선이나 다른 전차를 바꿔 탔다.이 끝도 없는 오스트라바 변두리,공장과 자연, 벌판과 쓰레기더미, 나무들과 탄광의 재 무더기, 커다란 건물들과 조그마한 농가 등이 기이하게 한데 섞여 있는 그 변두리 풍경 전체가 내 눈길을 끌었고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어 산란스럽게 했다.나는 전차에서 아예 내려 오래 걷기 시작했다.거의 마음을 온통 빼앗긴 채 이 기이한 풍경을 바라보며 그 의미를 해독해 내려고 애써 보았다.이렇게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마구 뒤섞인 풍경에 통일성과 질서를 부여해 주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담쟁이덩굴이 우거진 한 전원풍 집을 지나가게 되었다.그 집은 바로 뒤에 마치 기둥처럼 삐죽삐죽 솟아 있는 굴뚝이나 높다란 용광로의 흉측한 모습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기가 그 집이 있어야 할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고 나서 빈민가 판잣집들을 따라 걷는데 조금 더 멀리 있는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더러운 잿빛 집이었으나 정원이 빙 둘러 있고 쇠창살 문도 있었다. 정원 한 모퉁이 수양버들은 이 풍경 속에서 길을 잃고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런데 나는 바로 그래서 이 나무의 자리가 바로 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부조화가 마음을 어지럽혔다.단지 부조화가 이 풍경의 공통분모 같아 보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무엇보다도 거기에서 나는 나 자신의 운명, 여기에 유배된 나를 암시하는 어떤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자연히 나 개인의 역사를 도시 전체라는 한 객체 속에 그런 식으로 투영하면서 어떤 위안 같은 것을 받기도 했다. 담쟁이덩굴이 우거진 작은 집도 수양버들도 이런 장소들에 속하지 않듯이, 아무 데로도 이어지지 않는 짧은 길들, 서로 이질적인 건물들이 들어찬 그 길들이 그 장소들에 속하지 않듯이,나 또한 거기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납작한 판잣집들로 가득한 이 흉측한 지역이 지난날 쾌적한 시골이었던 이 장소들에 속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이곳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바로 내가 이곳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이 경악할 만한 부조화의 도시, 이질적인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무자비하게 끌어안고 있는 이 도시,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하는 내 자리라는 것을.


소설의 이 부분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봤다.사람의 감정을 글로써 이렇게까지 잘 풀어낼 수도 있구나, 싶어서 다시 한번 글로 옮겨봤다.


그러고 보니 환승역에서 내려본 건 처음이었다.그렇게 익산역에서 다음 열차를 기다렸다.한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분위기라 약간 낯설기도 반갑기도 하다.팔걸이도 없는 밋밋하고 기다란 의자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피로감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하루 전, 브리즈번 공항에서의 그 익숙함 그리고 이 환승역에서의 이 낯설음.나는 어디에 있는걸까. 아니, 난 어디로 가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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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amy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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